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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유물 보존처리 이야기

보존의 다양한 역할: 평정건(平頂巾) 보존처리

왕실유물 보존처리 이야기


평정건(창덕23816) 보존처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993년 창덕궁으로부터 옮겨져 보관되어온 흑색 모자 16점이 있습니다. 예전에 흑백사진으로 소개된 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작은 모자입니다.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의 이 모자는 ‘평정건(平頂巾)’입니다. 이 글에서는 평정건 보존처리를 중심으로, 유물에 관한 종합적 이해와 보존의 역할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 실물조사: 유물의 현재
평정건은 매우 낯선 형태의 모자입니다. 접혀 있을 때, 위에서 아래로 좁아지는 길쭉한 육각형을 띠고 있는데, 가로세로 20㎝ 크기의 사각형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입니다. 겉과 안이 모두 직물로 만들어져 있지만, 섬유의 종류와 직조방식은 눈으로만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간단하게는 돋보기로 관찰하고, 그보다 세밀하게는 휴대용 현미경(Scalar-DG3x®)을 사용합니다(그림 3, 4). 휴대용 현미경은 대상을 몇 백배까지도 확대해 볼 수 있고, 보이는 화면을 바로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비 중 하나입니다. 더욱 자세하게 관찰하려면 주사전자현미경(SEM, Scanning Electron Microscope)을 사용합니다. 시료에 전자선을 쏘아서 입체구조를 관찰하는 방법입니다(그림 5). 이러한 방법을 통해 모자의 겉감인 흑색의 부드러운 직물은 비단의 한 종류인 주(紬)이고, 거칠고 성글게 짠 자연색의 안감은 삼베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겉감 주(紬) 안감 삼베 견섬유


이 모자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접혔다가 펼쳐지는 형태의 변화입니다. 접어서 보관할 때는 작고 납작하지만, 펼쳐서 머리에 쓰면 멀리서도 보일만큼 상당한 높이로 커지게 됩니다(그림 6). 언뜻 보기에는 여러 조각을 연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장의 천을 계획적으로 재단하여 접고 이어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평정건에는 형태 변화를 위한 장치들도 숨어 있습니다. 모자 앞면을 보기 좋게 세우기 위해 안쪽에 긴 대나무심을 넣고, 뒷머리 중앙 바닥 쪽에는 작은 대나무 꽂이[첨자, 籤子]를 실로 달아두었습니다(그림 7). 모자를 쓸 때 이것을 망건 안쪽에 핀처럼 끼워 고정시키면 잘 벗겨지지 않습니다. 모자의 형태와, 평면에서 입체로 변화되는 과정의 움직임,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이해하는 것은 유물  손상부위의 위치와 면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곳을 어떤 방법으로 보강할지 결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평정건의 형태변화

 ● 기록연구: 유물의 과거
유물의 형태·구조·재료에 대한 연구가 대상의 ‘현재’에 초점을 맞춘 조사라고 한다면, 유물의 옛 기록을 조사하는 것은 ‘과거’를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평정건은 썼을 때의 모양 때문에 ‘파리머리’ 또는 ‘승두(蠅頭)’라고도 불렀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관모로, 궁궐이나 관아에서 근무하던 하급 관리층인 ‘이서(吏胥)’ 신분이 사용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대전별감(大殿別監)과 궁중의 잔치 때 노래를 부르던 ‘가자(歌者)’는 자주색, ‘세자궁별감(世子宮別監)’은 청색, ‘수복(守僕)’은 흑색 평정건을 착용하였습니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1759)』, 옛 성균관 문묘제례(文廟祭禮) 사진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그림 8, 9).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평정건은 종묘나 성균관 대성전 등의 수복이 사용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평정건을 쓴 별감,성균관 문묘제례 장면



● 보존처리: 유물의 미래
보존처리자는 유물의 현재 상태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유지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변화는 제거, 접합, 보강 등 여러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짙은 검은색 모자를 희뿌옇게 보이도록 덮은 오래된 먼지, 이물질들, 그리고 곰팡이는 제거하였습니다(그림 10). 튿어진 곳이나 구멍난 곳은 모자를 움직일 때 가장 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재접착하고 보강해주어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유지’가 공존하기도 합니다. 평정건(창덕 23814)의 보존처리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평정건의 윗쪽 모서리는 손상되어 떨어져나가고, 그 주변 직물은 짙은 갈색으로 변하여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손상이 심해지지 않도록 새로운 재료로 채우되, 실물조사 결과 밝혀진 원형구조와 제작방법을 따라 풀로 접착하고 바느질은 하지 않았습니다(그림 11). 보강을 위한 재료는 유물에 지나치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얇으면서도 주변 부위를 지지하기에 적절한 힘을 가진 견직물을 선택하였습니다. 겉감의 색변화 또한 유물 원형의 일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보강직물이 손상부위 주변의 색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여러 색조로 염색하였습니다(그림 12).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유물의 상태안정화라는 최초의 목적을 이루면서도, 관람자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외관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보기에 편안하면서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변형된 부분을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보존처리자가 선택한 ‘변화와 유지의 절충’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물질 제거,튿어진 부분 재접합,손상부분 보강


대부분의 박물관 소장품은 전시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존처리자는 유물의 보존관리와 더불어, 관람객의 유물에 대한 감상과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보존처리 결과를 이끌어내는 역할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또한, 평정건과 같이 지금까지 사진과 회화 등 평면자료만 소개되고 입체적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던 유물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여, 고증·재현을 돕는 역할도 보존처리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선영(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