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시
특별전시
세조世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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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8/10/22~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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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지하 궁중서화실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널리 알려진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는 조선의 제7대 국왕이다. 본인의 형제와 많은 신하를 죽인 정변으로 조카인 단종端宗(1441~1457, 재위 1452~1455)의 왕위를 빼앗아 왕좌에 올랐다. 도덕성과 명분이 결여된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반면, 통치와 업적은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재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 전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정치·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을 함께 선보인다. 또, 세조란 묘호廟號[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가 의미하듯, 그의 사후 왕릉[광릉光陵]과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에서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 숭배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야심차고 비정한 군주로 알려진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Prince Suyang: The Second Son of King Sejong
세종世宗(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1395~144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세조는 진평대군晉平大君, 진양대군晋陽大君,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불렸다. 문학과 활쏘기·말타기에 있어 독보적으로 뛰어났으며, 천문·수학·음악·의술 등 다방면에 능했다.
Sejo, the Usurper, and the Attempt to Reinstate King Danjong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시도한 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단종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단종과 그를 위해 목숨을 건 신하들의 이야기는 역사에 충忠의 상징이 된 반면, 세조는 조카의 왕위와 목숨을 빼앗은 비정한 군주로 자리매김 했다.
세조의 통치와 업적
Governance and Accomplishments of Sejo
세조는 재정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재를 확립했으며, 직접 쓴 글과 시를 매개로 신하의 뜻을 살피거나 충심을 고취했다. 또, 불경 간행을 전담하는 기구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주요 불교 경전에 대한 한글번역본[언해본諺解本]을 발행했다.
세조 어진의 전승 내력과 <세조 어진 초본>
History of the Portrait of Sejo and Its Sketch
세조 사후 광릉光陵[세조의 왕릉] 근처 봉선전奉先殿에 봉안된 세조어진은 임진왜란(1592~1598)과 뒤이어 일어난 두 차례의 호란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작업을 진행하다가 1735년(영조 11) 모사본을 제작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이왕직李王職은 화사 김은호金殷鎬(1892~1979)에게 세조 어진 모사 작업을 맡겼다. <세조 어진 초본>은 이 때 김은호가 1735년 본을 본뜬 밑그림이다.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 보관되었던 조선시대 어진 대다수가 1954년 12월 용두산 화재로 소실된 상황에서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
Sejo Worshipped as a King Who Rebuilt the State
후대 왕들은 ‘세조’란 묘호廟號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의 칭호]가 시사 하 듯 세조를 이성계에 버금가는 임금으로 숭배했다. 후대 왕들은 종종 세조의 왕릉인 광릉과 어진을 모신 진전에 들려 제향을 지냈다.
Gwangneung: The Royal Tomb of Sejo
ㅇ 강연내용
- 조선의 국왕, 세조 (오종록 /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 세조어진 초본의 연원과 양식 (신재근 /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 세조어진의 봉안과 숭배, 그 의미 (손명희 /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관련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