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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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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21/07/07~202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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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2층 기획전시실
모란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민간을 막론하고 식물 자체는 물론 무늬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았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도 풍요와 영화로움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궁궐이나 생활용품을 꾸밀 때 용과 봉황, 거북에 견줄 만큼 모란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모란에 담긴 의미는 살아서의 부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인물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무늬로 모란을 썼습니다. 왕실 흉례 때 고인의 시신과 혼이 자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모란도 병풍을 둘러 고인을 지키고, 죽음 후 조상신이 된 국왕과 왕비가 나라에 영원한 안녕과 번영을 가져와줄 것을 기원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 왕실에서 모란이라는 식물과 그 무늬를 어떻게 향유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모란에 담긴 다양한 상징을 소개합니다. 제목 “안녕, 모란”은 서로에게 안부를 물으며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고, 조선 왕실의 안녕을 빌었던 모란무늬처럼 우리 모두의 안녕을 비는 주문이기도 합니다. 모란 그 크고 화려한 꽃송이에, 그 화사한 향기 속에 여러분의 안부를 물어봅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해 봅니다.
Ⅰ. 가꾸고 즐기다
Growing and Enjoying Peonies
신라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년) 대에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모란은 고려시대 궁중과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고려사高麗史』 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궐 안에 핀 모란을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전해진다. 또한 모란에 대한 시가 여러 편 남아 있어 모란을 향유하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모란은 관상용 식물로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랑받았다. 조선 전기부터 궁궐 후원이나 종친宗親들의 이름난 정원에 심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원예 취미의 확산과 더불어 저술된 다양한 원예서에도 빠짐없이 등장했다.
모란에 대한 애호는 모란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18세기 화훼화花卉畫의 유행, 식물에 대한 박물학적 관심이 증대하는 가운데 모란이 그려지기 시작해 19세기에 절정을 이뤘다. 한편 민간에서는 모란이 상징하는 부귀화의 염원을 담은 모란도가 크게 성행하여 민화民畫의 대표 주제로 자리 잡았다.
Ⅱ. 무늬로 피어나다
Blooming Peonies as Designs
중국 오대五代(10세기) 때 처음 나타난 모란무늬는 대표적인 길상무늬 중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민간과 왕실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랑받았다. 모란무늬가 길상무늬로 자리 잡은 데에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君子로, 모란을 부귀富貴한 자로 비유한 송宋 대 주돈이周敦頤(1017~1073년)가 저술한 「애련설愛蓮說」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모란무늬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해 조선 말, 대한제국까지 꾸준히 쓰였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각종 의례·생활용품 등에도 모란무늬를 즐겨 장식하였다. 특히 행복한 삶에 대한 축원으로 가득한 혼례婚禮와 관련된 의복, 부채, 병풍 등 여러 물건에 모란은 주된 장식 무늬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벽사闢邪와 기복祈福의 풍조가 강하게 나타나 다양한 길상무늬가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모란의 길상성 또한 더욱 강조되어, 각종 생활용품과 공예, 건축물 등의 장식에 그 어느 시기보다도 풍성하고 화려한 자태로 피어났다.
중국 오대五代(10세기) 때 처음 나타난 모란무늬는 대표적인 길상무늬 중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민간과 왕실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랑받았다. 모란무늬가 길상무늬로 자리 잡은 데에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君子로, 모란을 부귀富貴한 자로 비유한 송宋 대 주돈이周敦頤(1017~1073년)가 저술한 「애련설愛蓮說」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모란무늬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해 조선 말, 대한제국까지 꾸준히 쓰였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각종 의례·생활용품 등에도 모란무늬를 즐겨 장식하였다. 특히 행복한 삶에 대한 축원으로 가득한 혼례婚禮와 관련된 의복, 부채, 병풍 등 여러 물건에 모란은 주된 장식 무늬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벽사闢邪와 기복祈福의 풍조가 강하게 나타나 다양한 길상무늬가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모란의 길상성 또한 더욱 강조되어, 각종 생활용품과 공예, 건축물 등의 장식에 그 어느 시기보다도 풍성하고 화려한 자태로 피어났다.
Ⅲ.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다
Peonies Embodying Wishes for a Peaceful Royal Court and a Prosperous Dynasty
모란은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도상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 궁궐의 장식 그림으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만큼이나 많이 그려진 것이 바로 모란도牧丹圖였다. 특히 모란도 병풍은 왕실 조상을 섬기는 의례에 중요하게 사용되어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흉례凶禮는 고인이 된 국왕과 왕비를 왕실과 나라를 돌보는 조상신으로 모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흉례의 각 절차마다 고인의 시신이나 혼魂이 자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모란도 병풍을 설치했다. 역대 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진전眞殿의 어탑御榻 뒤에도 으레 모란도 병풍을 두도록 했다. 그 밖에도 왕릉의 석물, 선원전璿源殿 같은 진전 건축, 왕실 사당 건축의 곳곳에 모란무늬를 조각해 장식했으며, 신주를 놓는 의자[교의交倚], 부장품을 운반하는 가마[채여彩轝], 신주를 운반하는 가마[신여神轝] 등에서도 모란 장식을 확인할 수 있다.
모란도 병풍 牧丹圖屛 Folding Screen with Peonies
모란이 뿌리에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을 화면 가득 반복적으로 그린 병풍이다. 모란도 병풍은 혼인이나 잔치와 같은 왕실의 경사 때도 설치했으나 왕실 상장례의 주요 절차마다 쓰였다. 특히 망자의 관 주위, 신주를 모신 교의 주위 등에 둘러쳤는데 4폭과 8폭의 병풍을 주로 사용하였다. 모란도 병풍은 정형화된 형태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폭마다 괴석 사이 혹은 흙 언덕 위로 자란 모란 꽃송이들을 가득 표현했다.
모란이 뿌리에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을 화면 가득 반복적으로 그린 병풍이다. 모란도 병풍은 혼인이나 잔치와 같은 왕실의 경사 때도 설치했으나 왕실 상장례의 주요 절차마다 쓰였다. 특히 망자의 관 주위, 신주를 모신 교의 주위 등에 둘러쳤는데 4폭과 8폭의 병풍을 주로 사용하였다. 모란도 병풍은 정형화된 형태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폭마다 괴석 사이 혹은 흙 언덕 위로 자란 모란 꽃송이들을 가득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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