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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이 담긴 인장, 정조 효손 은인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이 담긴 인장, 정조 효손 은인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에게 올려진 의례용 인장인 어보는 국립고궁박물관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보는 바닥면이 넓은 육면체형의 인판과 그 위에 부착된 거북 모양 손잡이, 그리고 술장식이 달린 보수(寶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방형의 바닥면에 어보 주인의 아름다운 덕과 훌륭한 공을 기리는 뜻이 담긴 복잡한 한자가 정확한 구획 안에 꺾임이 많은 전서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어보와 달리 붓으로 쓴 글씨를 그대로 새겨 만든 어보가 있으니 바로 말년의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내려 준 은인(銀印)입니다. 은인의 바닥면에는 ‘孝孫 八十三書’라고 새겨져 있는데, ‘孝孫’은 정조를 가리키고 ‘八十三書’는 영조가 83세에 썼다는 의미입니다. 이 은인에는 머지않아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손자의 위상을 높여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다져주고자 했던 할아버지 영조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조가 정조에게 은인을 내려주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영조와 정조에게 이 은인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정조 효손 은인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겨우 네 살의 나이에 책을 읽고 글씨를 쓸 정도로 일찍부터 빼어난 자질을 보여주며 아버지 영조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사도세자는 성장하면서 영조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지 못했고, 실망을 넘어서 분노한 영조와 부친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된 세자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아버지가 아들의 세자 지위를 박탈하고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사후 그의 아들 정조는 동궁(東宮)으로 책봉되고, 영조의 명에 의해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효장세자는 영조와 후궁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의 첫 번째 아들로 어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더 이상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조는 이렇게 함으로써 죄인의 몸으로 사사(賜死)된 사도세자의 그늘로부터 세손 정조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정조의 생부(生父)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쓴 정조는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맞서야 했습니다.

1775년(영조51) 11월 영조는 자신이 노쇠하여 정사를 제대로 돌보기 어려우니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며 동궁의 대리청정을 정면에서 반대하였습니다.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위에 분노한 영조는 관련 대신들을 파직시켰고 세손 정조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에 임하며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1776년(영조52) 1월이 되자 영조는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세손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했고, 정조 역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 나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2월 4일 세손 정조는 흑포립(黑布笠)에 백포(白袍)와 흑대(黑帶) 차림으로 꿇어 엎드려 ‘전하께서는 신에게 곧 하늘입니다.’로 시작하는 간절한 내용의 상소를 영조에게 올려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내용들을 삭제해 주길 요청했습니다. 상소문의 내용에 깊이 감동한 영조는 승정원일기를 세초하라고 즉시 명하였고, 사도세자를 위한 제문을 지어주면서 세손에게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후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언급하는 자는 역적으로 간주하여 죄를 물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어서 2월 6일 영조는 대신에게 세손의 상소를 소리 내어 읽어 보라 명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 자신의 극단적 처분을 종묘와 사직을 위한 의로운 일로 평가하는 동시에 생부에 대해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세손의 충심(忠心)과 효심(孝心)에 깊이 감동하였음을 표하며 세손에게 은인과 유서(諭書)를 내리기로 결정하고 즉시 유서의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유서에서 영조는 세손의 충심과 효심을 칭찬하고 세손의 훌륭한 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孝’자를 새기기로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같은 날 영조는 승정원일기를 세초한 일을 축하하는 진하(陳賀)를 받았습니다.

영조가 직접 붓으로 쓴 ‘孝孫’이라는 글자를 새겨 만든 은인을 세손에게 하사한 것은 2월 9일의 일입니다. 은인에 새길 글씨를 써서 내린 것이 2월 7일의 일이니 이틀만에 은인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날 세손 정조는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경희궁 집경당 뜰에서 무릎을 꿇고 영조로부터 은인과 유서를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왕위 계승자로서 세손 정조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세손이 이 날 광달문(廣達門)에 앉아 은인을 찍을 때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기뻐서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영조는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3월 5일 숨을 거두었고, 3월 10일 정조가 즉위하였습니다.

영조는 은인과 유서를 내려 주면서 “이 인(印)은 세손을 따라야 하므로, 이후 거동할 때에는 이 인이 앞에서 인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후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은인과 유서를 조회(朝會)나 거둥 때에 항상 앞에 두게 하였고, 실제로 정조대의 궁중행사기록화에서 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은인과 유서를 담당하는 관원인 ‘은인차비(銀印差備)’와 ‘유서차비(諭書差備)’를 따로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은인과 유서는 시신을 모신 빈전을 거쳐 정조의 신주를 모신 혼전에 봉안되었다가, 1802년 신주가 종묘에 봉안될 때 함께 종묘 신실로 옮겨졌습니다.

‘효손 은인’은 세손 정조의 위상을 높이고 정치적 기반을 다져 주고자 했던 영조의 노력과 의지가 집약된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인에 새겨진 83세 노인 영조의 친필에서, 세손 정조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고 왕위에 올라 거침없이 국정을 펼치기를 소망했던 영조의 고뇌와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참고문헌
김문식,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47, 문헌과해석사, 2009 pp.61~76. 


이종숙(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