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조선시대 궁궐 공사 기록,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조선시대 궁궐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왕실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궁궐은 조선 600여 년간 반정, 화재를 비롯한 여러 역사건 사건 속에서 수많은 영건과 중건, 수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은 최초에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운 후 상황에 따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 경운궁慶運宮(덕수궁德壽宮)을 건립해 조선의 궁궐은 모두 5곳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가장 오랫동안 왕이 기거하며 사랑을 받았던 궁궐은 창덕궁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에서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르면서도 왕과 그 가족들은 자주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 왕실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었을 때도 창덕궁은 곧바로 재건되어 고종 대에 경복궁이 다시 재건되기 전까지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 창덕궁은 일제 강점기에 도성의 5대 궁궐이 모두 훼손되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오랫동안 조선 왕조의 정궁이었던 만큼 수리와 증건 등 공사가 가장 잦았던 궁궐이었기도 합니다. 또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 나라 안팎의 소요가 있을 때마다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목조 건축의 특성상 화재가 잦았기에 그에 의한 재건 공사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매번 궁궐을 공사할 때에는 도감을 설치하고 공사의 전말과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남겨 현재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덕궁수리도감의궤』도 창덕궁의 수리 역사를 상세히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인조반정(1623년) 때 소실된 창덕궁을 1647년(인조25)에 수리했던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당시 인정전 등 몇몇 전각만을 남기고 대부분 소실된 창덕궁을 수리하기 위하여 광해군이 창건했던 인경궁을 철거, 그 목재로 대조전·선정전·희정당·저승전 등을 수리하는 데 썼다고 합니다. 그럼, 1647년의 창덕궁 수리공사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요.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외전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어서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왕실은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1633년(인조11) 비교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됩니다. 계속 미루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되는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된 세력이 제거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창경궁 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덕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습니다. 창덕궁이 소실된 지 25년 만이었습니다. 이때 복구된 주요 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징광루 등이었습니다.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술 순서는 공사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왕에게 올리는 글인 계사(啓辭), 계사질(啓辭秩),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移文秩), 감결질(甘結秩), 그리고 그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 순입니다. 다음으로 1소(一所), 2소(二所), 3소(三所), 4소(四所), 5소(五所), 노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 등이 있습니다. 창덕궁 공사를 위해 인경궁에서 철거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거된 목재와 기와의 수량을 적었는데, 이 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가 817칸이었습니다.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의 규모가 커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었는데, 이 의궤를 통해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도 파악할 수 있다. 또 창덕궁에 조성되는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등)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 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도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 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 대까지 유지되어 <동궐도>의 그림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순조33)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의궤 속 상세한 공사 기록은 현재 궁궐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소중한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임소연(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