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1900년, 파리
여기 지름 5cm 가량의 원형 주화(鑄貨)가 있습니다.[도 1] 주화 앞면에는 여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손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천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여신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조선 왕실과는 도무지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이미지입니다. 이 주화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의 기념주화입니다. 당시 만국박람회라는 것은 세계 각국의 문화와 산업이 전시되는 장이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는 엑스포(Expo)라는 표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념주화 뒷면에는 배, 열기구, 전신주, 카메라 등이 새겨져 있는데요, 박람회라는 성격에 걸맞게 당시 산업의 첨단에 자리한 물품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도 2] 박람회 기념주화라고 하면 그 자체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 도대체 조선 왕실과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기 3년 전인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알리고 독립된 국가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에 만국박람회만큼 좋은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정치경제적 여건에서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박람회에 참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초청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 박람회 참가가 성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한국 전시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토대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던 일간지인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에는 한국 전시관의 모습을 담은 삽화가 실렸습니다(1900년 12월 16일자).[도 3] 삽화에는 기와를 올린 한국 전통식 2층 건물이 등장하고 주변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한쪽에는 태극기도 있습니다. 이 삽화 덕분에 파리 한복판에서 독립된 전시관을 설치하고 한국의 문화를 선보였던 그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박람회에는 우리 문화를 대표할 만한 전시물로 도자기, 칠보공예품, 의복, 가구, 악기 등이 출품되었다고 합니다. 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기증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파리에서 한국까지 운송해 오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당시 전시되었던 유물들이 프랑스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박람회를 기념하는 물건들뿐인데요, 앞서 살펴본 기념주화와 함께 당시의 박람회 가이드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도 4]
한편, 당시의 박람회는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품을 선정하여 상을 주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필리뷔(Pillivuyt)라는 도자기 회사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최고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했는데 이후 생산된 도자기에는 이러한 수상 기록을 표시하였습니다.[도 5, 6, 7]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프랑스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하였는데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필리뷔의 제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도자기들에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李花文)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주문 제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인 1900년, 파리는 배를 타고 한참을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세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문화를 주고받으며 싹틔웠던 한국과 프랑스의 인연이 지금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그 자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신재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