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조선시대 야간 통행패, 통부(通符)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신분패, 부신(符信)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부신은 오늘날의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했던 표식이었습니다. 통부(通符), 마패(馬牌), 발병부(發兵符), 부험(符驗), 좌변포도대장패(左邊捕盜大將牌) 등이 남아 있는데, 이번 수장고 속 왕실유물이야기에서는 야간 통행패였던 ‘통부’(그림1)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간통행금지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습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날이 밝은 후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고 규정하고 있고, 2경 후부터 5경 전까지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이를 어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로 야간의 통행이 인정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급한 공무나 질병, 상사나 해산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통행하는 사람은 직접 순찰관이나 경비소에 사유를 알리면 순찰관이나 경비소에서 사람을 시켜 야간경비 패를 가지고 가야 할 집까지 그를 데려다 준 다음 이튿날 병조에 보고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였습니다. 이처럼 야간에는 도성과 궁성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는데 통부를 소지한 자는 통행의 금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통부는 도둑을 잡는 신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포도대장이 도둑을 잡는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 아랫사람인 종사관·군관도 모두 몸에 통부를 차고 여염집을 출입하였고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아무리 높은 관리나 임금의 친척이라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통행표신(通行標信)’이라고 불렸으며 원형으로 만들어 한 면에는 ‘통행(通行)’이라 쓰고 다른 면에 전자로 ‘通行’이라는 불인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성종 24년(1493)에 통부로 개조하여 사용되었고 순종 즉위년(190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통부는 조선시대 이조·형조·병조·의금부·한성부의 5부와 포도청에서 숙직한 관원이 교대 근무 시에 받아서 승정원에 바쳤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신분패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허리 사이에 숨겨 차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통부를 차고서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을 함부로 대한 자, 통부를 빼앗은 자, 통부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 통부를 임무시간에 받아가지 않은 자 등에 대해서도 엄한 벌을 내렸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새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 통부를 비롯한 부신을 새로 만들어 나누어 주고, 전 임금 때 사용하던 부신은 모두 거두어서 폐기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시대 부신은 매우 드물며 대부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3점의 통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통부들은 광무원년(1897)에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새롭게 제작되어 순종 즉위년(1907)에 통부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던 것입니다. 원형의 형태에 글자가 음각이 되어 있고, 위쪽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으며 일부는 끈이 남아 있습니다. 한 면에는 ‘通符’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불인장이 찍혀 있으며(그림3,4), 왼쪽으로는 ‘光武元年正月 日字’가 새겨져 있습니다.(그림2) 다른 면에는 각각 ‘二玄, 六天, 七天, 十洪, 七荒, 二日, 七日, 八日, 十月, 五盈, 九盈, 八盈, 四吳’ 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통부에 대한 기록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장서각 3-567)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의하면 당시에는 모두 147부가 제작되었습니다. 이외에 통부의 도설, 형태, 크기, 제작 수량 등에 대해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부는 비록 크기가 작고 현재 적은 수량만 전하고 있지만 당시 국가와 도성을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한 옛사람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임(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