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제갈공명의 상징, 와룡관(臥龍冠)
‘모자의 나라 조선!’근대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조선의 모자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는 다양한 모자를 착용한 조선인들이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유교의 영향으로 조선의 사대부는 맨상투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집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는 관모를 쓰고 접대하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조선에는 금관(金冠), 사모(紗帽), 갓이라 알려져 있는 흑립(黑笠) 뿐 아니라 정자관(程子冠) 등 다양한 모자가 존재했습니다.
이번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는 조선의 다양한 모자들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와룡관(臥龍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창덕궁으로 부터 이관된 와룡관 1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와룡관은 위로 갈수록 폭이 점점 넓어지고 모자 상단에는 세로로 골이 나있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좌우 양 옆에는 마치 양의 뿔처럼 나선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와룡관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국지로 잘 알려진 촉(蜀)나라의 재상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이 즐겨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윤건(綸巾) 또는 제갈건(諸葛巾)이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는 제갈량의 호인 와룡(臥龍)을 붙여 와룡관이라 불렀습니다.
중국의 도설 및 회화에서 제갈량의 도상은 학창의(鶴?衣)에 와룡관 차림으로 대표됩니다. 숙종의 친서가 있는 조선시대의 그림인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에서도 제갈공명은 와룡관에 학창의 차림을 하고 있는데, 숙종은 이를 윤건에 학창의 차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와룡관은 누가 언제 착용한 것일까요? 조선의 학자들은 집에서 편하게 착용하는 연거복(燕居服) 차림이나 학창의라는 의복과 함께 와룡관을 착용하였습니다. 고종대의 『승정원일기』에 관련 기록이 있는데, 정작 당시 중국에는 와룡관이 이어져 내려오지 않아 조선의 사신인 박규수의 옷차림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 고(故) 상신(相臣) 박규수(朴珪壽)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학창의(鶴?衣)를 입고 와룡관(臥龍冠)을 쓴 채 조사(朝士)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선왕의 법복이다.’ 하고는 그 옷을 벗기를 청하여 …
『승정원일기』2925책, 1884년(고종 21년) 6월 8일 기사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년)의 초상화에서도 학창의에 와룡관 차림이 나타납니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표제에는 ‘臥龍冠鶴?衣本(와룡관학창의본)’이 적혀있어 관모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있습니다. 초상화에서 흥선대원군은 탕건이라는 모자를 쓴 후, 그 위에 와룡관을 착용하였습니다. 와룡관은 말총을 엮어 제작했기 때문에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도가 높아 초상화에서도 와룡관 내의 탕건의 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와룡관의 높이는 약 24㎝, 탕건의 높이는 약 14㎝로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두 모자의 높이비와도 유사합니다.
이 와룡관은 누가 착용했는지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덕궁에서 이관되었고, 조선 왕가의 일원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착용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왕실의 구성원이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와룡관은 국내에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와룡관은 조선시대의 다양한 관모의 사례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를 통해 조선에 보다 다양한 관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원고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2007년
장준구, 「明, 淸代 시각문화를 통해 본 諸葛亮 圖像의 전개와 성격 변모」, 『미술자료』79, 2010년
홍나영, 신혜성, 이은진,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2011년
이정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