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탕평을 이룬 영조의 시각적 표상, <영조어진>
<영조어진>(보물)은 1900년 화재로 선원전에 모셨던 어진들이 모두 소실되자 중건한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육상궁 냉천정에 봉안한 영조의 익선관본 소본을 모사한 것입니다. 이 소본은 영조가 51세 때인 갑자년(1744)에 제작한 어진 3본 중 하나였습니다.
영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생모의 미천한 출신뿐 아니라 세제 시절 자신과 연루된 두 가지 혐의로 즉위 이후에도 오랜 기간 정통성 논란과 이에 따른 정정의 불안에 시달린 인물입니다. 영조가 연루된 두 혐의는 경종 원년 노론이 주도해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고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서두르다 소론의 공격으로 노론의 핵심 사대신이 죄를 입은 신축옥사(1721)와 경종 시해를 위한 세 가지 계획을 세워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남인 목호룡의 고변으로 많은 노론 인사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임인옥사(1722)입니다.
냉천정 봉안 익선관 소본이 제작된 1744년은 임인옥사가 소론 일부 세력의 무옥(誣獄,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죄가 있는 듯 꾸며내어 죄를 다스림)으로 발생한 것으로 판단한 경신처분(1740)과 노·소론 출신 탕평파의 협조 속에서 이를 대훈(大訓, 임금의 훈시)으로 반포한 신유대훈(1741)으로 자신의 정통성에 타격을 입힌 혐의를 어느 정도 벗은 시점이었습니다. 이 해 영조는 51세에 불과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로소 입사를 단행하고, 새로운 어진 제작에 대해 신하들의 여론을 떠보며 어진 도사를 함께 추진해 나갔습니다. 즉, 1744년 기로소 입사 및 어진의 제작과 봉안은 왕위 정통성 시비를 어느 정도 매듭짓고 국왕 주도의 탕평 정치를 확립한 시점에 왕실의 정통성이 숙종에게서 자신에게 이어짐을 극대화하고 기념하는 행사로 함께 행해진 것입니다.
영조는 태조와 숙종을 계술해 기로소에 입사한 왕으로 『속대전』, 『춘관지』, 족보 등에 기재되며 태조·숙종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로소 입사에 맞춰 제작한 갑자년(1744)의 어진은 이 같은 역사적 행사를 기념한 초상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갑자년에 제작한 어진은 익선관본 정본(대본), 면복본 정본, 익선관본 소본이었습니다. 어진 도사를 마친 후 영조는 신하들에게 갑자년 어진 두 본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지금 이 畫像을 여러 신하들에게 내어 보이는 것은 이것을 구경시키려는[觀瞻] 것이 아니라, 후일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화상을 보고 길이 『大訓』의 뜻을 따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속오례』·『속대전』·『대훈』이 모두 완성되었으니 내 나이가 비록 늙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일은 끝난 것이다”(『영조실록』 권60, 영조 20년 12월 1일 갑진)
여기서 대훈은 1741년 탕평파의 협조로 왕위 정통성 시비를 일정 부분 마무리 지은 신유대훈의 반포와 이를 계기로 간행된 『어제대훈』(1741)을 가리킵니다. 즉, 갑자년(1744) 도사된 어진들이 즉위 이후 왕위 정통성 논란을 마무리 지은 노년의 영조를 기념한 초상화이자 ‘대훈’을 통해 확정된 정치 의리의 시각적 표상임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조가 1745년에 갑자년 익선관본 정본을 숙종어진을 모신 강화도 장녕전 옆의 만녕전에 봉안하고 갑자년 면복본 정본을 사후 영희전에 봉안하도록 1748년과 1773년에 지은 어제에 거듭 밝힌 데는 어진으로써 선왕들을 모시고자 한 뜻과 함께 이러한 정치적 상징성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갑자년 익선관본 소본은 육상궁 냉천정에 봉안되었는데, 1744년은 생모인 숙빈 최씨 사당의 호(廟號)를 ‘육상’으로 고쳐 높인 해이기도 합니다. 어진 소본의 육상궁 봉안은 생모를 항시 모시고자 하는 영조의 효심과 함께 사묘의 위상 강화를 통해 본인의 정통성과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한 의도를보여줍니다.
중건한 선원전에 새롭게 봉안할 목적으로 1900년에 냉천정 봉안 ‘갑자년 익선관 소본’을 모사한 <영조어진>은 붉은 기가 많이 도는 얼굴에 흰 수염이 검은 수염과 섞여 있는 모습입니다. 1744년 11월 제작 중인 어진을 신하들에게 보여 의견을 묻는 과정에서 영조 본인의 수염과 머리털이 흑백이 서로 반씩 섞인 반백(頒白)을 넘는다는 언급과 영조의 실제 안색은 붉고 윤기가 많이 도나 해당 본은 연한 듯 붉은 기가 부족해 붉은색을 더하는 것이 좋겠다는 신하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1900년 모사된 <영조어진>의 붉은 기가 강한 안면 묘사는 모본이 된 1744년의 익선관 소본이 이 같은 지적을 수용해 채색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차례의 화재로 대다수 조선시대 어진이 소실된 상황에서 얼굴 모습을 온전히 보존한 채 전하는 몇 안 되는 어진인 <영조어진>은 탕평을 추진하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고히 한 ‘대훈’의 시각적 표상으로 제작된 1744년 어진의 모사본으로 영조의 바람과 같이 ‘대훈’의 뜻과 당시 탕평책의 성과를 280년이 지난 현재에도 현현해 주는 듯합니다.
[참고문헌]
손명희, 「영조어진과 봉안처에 대한 재고찰: 어진의 다양성과 의미, 봉안처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103 (2023. 9.)
- 손명희(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