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왕명을 전하는 마패: 마패(창덕21094), 호남균부절목(고궁1294)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호남균부절목(湖南均賦節目)』은 조선시대 호남 지방, 구체적으로는 전라도 고창현에서 시행된 일종의 세금 징수 지침서입니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은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힘없는 일반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각종 세금 부담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세금 징수에는 세액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세금 부담을 약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거나, 다종다양한 잡세가 마구 생겨나는 등 세입구조와 운영의 문제도 컸습니다.
또한 각 지방군현의 재정을 건전하고 투명하게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하였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조선후기 각 지방군현의 재정은 점차 중앙재정에 잠식되어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방 군현에서는 각종 잡다한 세금을 만들어내어 재정을 보충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잡세가 무분별하게 운영되어 백성에게 민폐를 가중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방에서 세금을 함부로 거두는 것을 금하는 국왕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절목의 표지에는 ‘고창 산내면(高敞山內面)’이라는 지명과 ‘정축년 시월[丁丑年十月日]’이라는 날짜가 쓰여 있습니다. 1757년(영조 33) 고창현에 균부절목 원본을 내려보낸 후, 다시 고창현 내의 각 면에 배부하였던 것입니다. 절목의 내용은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지침을 내려보내는 임금의 뜻을 타이르는 말과, 고창현 백성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기준을 정하여 그 이상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부 규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용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각 면을 펼쳐 세 군데씩 마패가 날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패는 역참에서 역마를 타기 위해 제시하도록 국가에서 지급했던 증표입니다. ‘춘향전’ 같은 이야기의 영향으로 암행어사의 상징으로도 유명한 물건입니다. 이것을 마치 도장처럼 인주를 발라 찍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흥미를 끕니다.
사실, 암행어사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라면 암행 지역과 임무를 적은 밀서 외에는 마패밖에 없었으니, 암행어사 명의로 문서를 발급했다면 마패를 날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편, 오늘날 마패는 ‘가짜가 제일 많은 유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어느 유물감정가는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마패의 99%는 가짜다!”라고 단언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마패는 사용 후에 반드시 발급 관청에 반납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를 사사로이 빼돌려 역마를 타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기 때문에 진품 마패가 민간에 돌아다니는 일은 드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기념품 등의 목적으로 모조 마패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골동품상 등지에 돌아다니는 것은 정교하게 만든 모조 마패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마패는 오늘날 남아 있는 마패를 감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 궁중전래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는 15세기에서 1795년의 시기에 걸치는 마패 20여 점이 있는데, 이것이 현재 확실히 진품으로 알려져 있는 마패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마패들은 시기별로 말 그림의 도안에 뚜렷한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절목과 같이 마패가 날인된 문서의 패영을 실물 마패와 비교하여 시기를 추정해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에 따르면 1757년 작성된 『호남균부절목』에는 1723년(경종 3, 청 옹정원년) 주조 마패가 찍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해에 주조된 마패는 말의 눈, 갈기, 꼬리의 모양 등이 특징적이어서 전후 시기의 것과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패와 명령서를 받아들고 지방에 나간 경차관, 암행어사 등은 각 지방 관리들에게 새로운 왕명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만약 왕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한 점이 적발된다면 이를 다스리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암행어사의 문서에 찍힌 마패가 마치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는 임금의 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신가요?
박경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