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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제례에 올리는 향 / 향로(종묘9712), 향합(종묘9832)

활짝 핀 꽃나무 속 우뚝 솟은 세심대(洗心臺):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

향(香)은 향내를 풍기는 물건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직접 태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의식용의 향은 대부분 향원료를 연소시켜 그 연기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므로 향을 태울 향로가 필요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소장되어 있는데 제례용 향로의 수가 가장 많습니다. 제례용 향로는 높이가 22~30cm 정도 크기이며 놋쇠(유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기유조(己酉造)’, ‘임진조(壬辰造)’ 등 제작한 해나 ‘열한 근[十一斤]’처럼 무게를 바닥에 새겨 놓은 것도 있습니다. 


제례에 올리는 향 / 향로(종묘9712), 향합(종묘9832)


향로의 뚜껑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를 투각하였으며, 향로 안쪽에서 용의 입으로 통하는 구멍을 뚫어 용이 향 연기를 토해내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몸체는 아래쪽이 둥근 솥 모양으로 만든 다음 세 개의 다리를 달았습니다. 향로에는 전통적으로 어룡이나 용, 사자 같은 신비로운 짐승의 형상을 많이 이용했는데, 아마도 연기가 퍼질 때의 시각적 효과를 겨냥한 것이겠지요. 조선시대 거의 모든 제사의식에는 향로, 향합, 초가 함께 준비되었습니다.⑴

그런데 향은 왜 제사의 필수품이 되었을까요? 향로에 향을 사르는 방식은 불교와 함께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사람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하늘 제사에는 오직 쑥풀, 희생의 피와 기름을 태워 기운을 도달하게 할 뿐, 향을 태운다는 글은 없었다.(‘자단향변증설’)

한나라 이전에는 소향(燒香)이 없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에야 생긴 것이다.(‘분향변증설’)

그러나 향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 향은 불교와는 이질적인 의식들, 심지어는 종교의식이 아닌 의식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제례에 쓰인 것은 향나무로 만든 이른바 자단향이었는데 왕실에서 발원한 불교 행사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백단향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흥천사의 기우제는 으레 내의원의 백단향을 썼다. (『세종실록』 31.6.5.)

우리 동방의 공 ? 사 제향에는 속칭 ‘목향’ 또는 ‘자단향’이라고 하는 향만을 썼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자단향변증설’)


유교식 제례에서는 헌관이 향합의 향을 세 번에 걸쳐 피우고 그 향로를 신위 앞에 올리는 ‘삼상향’에 이어서 울창주를 땅에 붓는 ‘관창’을 함으로써 신을 불러 모셨습니다. 신을 모시기 전에 반드시 세 번 향을 올리는 것은 정성으로 제사하는 마음을 갖추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임금이 제사를 친히 올리지 못할 때는 헌관을 불러 향과 축문을 전하면서 제사의 임무를 위임하였습니다.

어휘를 축문에 써넣고 자단향을 향합에 담아 고운 헝겊으로 싸서 향과 축을 하나로 만들고, 봉인 위에 또 주상의 날인을 하였으니, 이보다 더 공경하고 삼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2.12.19.)

다음은 조선시대에 제례를 위해 향을 준비했던 방법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1443년(세종 25)의 어느 이른 봄날, 관원들이 원손(왕의 첫 손자)을 낳고 죽은 세자빈의 혼궁에 모여 제사를 지내려는 참이었습니다. 제사를 돕는 사람들이 좌우에서 향합과 향로를 받들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제례에 쓸 향이 담겨 있어야 할 향합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닙니까? 분향을 하려던 헌관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향실 별감 문손찬(文孫纘)은 향합을 봉하는 일을 전담하는데, 문소전과 혼궁의 향을 빈 합으로 봉하였사오니 율에 따라 곤장 90대를 칠 것을 청합니다. 우승지 조극관(趙克寬)도 향을 봉하는 직무를 담당하면서 점검하지 않았으니 율에 따라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세종실록』 25.2.18.)

“승지는 축문을 보고 향합의 봉인을 감독할 뿐이지 손수 향합에다 향을 담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향실 별감의 착오이고 극관의 죄가 아니니라.” (『세종실록』 25.2.25.)


향실 별감의 실수로 빈 향합을 봉인하여 제사에 보내는 일이 벌어지자, 감독 책임이 있는 승지 또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본래 궁중의 향실에서 향실 별감이 제사에 쓸 향을 향합에 담아 봉하면, 담당 승지가 봉인을 검사한 뒤 봉인 위에 임금의 어압을 받아 축문과 함께 제례 장소로 보냈습니다. 이와 같은 절차를 상세히 알고 있던 세종 임금은 이 사안이 담당 승지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제례용 향에 대한 이야기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고자 하는 옛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간편한 막대형 향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향 연기를 피워올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1) 조선시대 국가의례 중 상장례의 ‘천전(遷奠)’에만 향로 대신 향완을 씀.


박경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