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왕의 지극한 은택이 미물에까지 미치다 - 현륭원(顯隆園)의 송충이를 잡아 바다에 던지라는 정조의 전교(傳敎)를 새긴 현판
국립고궁박물관은 1798년(정조22)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이 수원부 유수(留守) 서유린(徐有隣, 1738~1802)에게 내린 전교(傳敎)를 새긴 현판 2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해 4월과 8월에 내려진 전교를 각각 새긴 이들 2점의 현판은 크기도 모양도 비슷합니다. 전교의 내용은 공통적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의 수목(樹木) 관리에 대한 것으로, 4월에 내린 전교는 현륭원의 숲을 훼손하는 송충이를 잡으라는 명을 담고 있으며 8월에 내린 전교는 현륭원 수목의 정기적인 가지치기 작업을 농한기인 10월에 시행하도록 규정하라는 명을 담고 있습니다. 두 현판에는 정조가 내린 전교 전문이 새겨져 있으며,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은 양쪽 다 전교를 받은 당사자인 수원부 유수 서유린입니다.
이 글에서는 송충이를 잡으라는 전교를 새긴 현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현판의 모양을 살펴보면 전문이 새겨진 바닥판(복판)은 흑색이고 글씨의 안쪽을 흰색으로 칠해 글자가 잘 보이도록 했습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변아(邊兒)가 둘러져 있는데 상부 변아와 좌우 변아의 끝으로 길게 나와 있는 부분인 봉을 조각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변아 표면에는 채색 안료로 길상문(吉祥紋)의 하나인 칠보문(七寶文)을 그려 넣어 왕의 전교를 새긴 현판으로서 품격을 더했습니다. 이 현판은 수원의 화성행궁이나 수원부 관아 건물 어딘가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판에 새겨진 전교의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정조가 왜 이런 전교를 내리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조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부친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부친을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지극한 마음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조치들로 이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1789년(정조13) 양주 배봉산(現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영우원永祐園)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묘의 이름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꾼 일입니다. 이 해 7월 정조는 영우원의 터가 얕고 좁아 사도세자를 모시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며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며 천 리에 다시없는 자리’ 인 수원의 길지로 묘를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같은 해 10월 현륭원 조성을 위한 공사와 의례를 마쳤습니다.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정조가 큰 관심을 기울인 것 중 하나가 묘소 주변에 울창한 숲을 조성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무를 심는 일은 현륭원을 조성한 그 해 가을부터 시작하여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조는 나무를 심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세심하게 일러 주기도 하고, 왕실의 재물을 관리하는 내탕고(內帑庫)의 돈 1천 냥을 내려 주어 현륭원에 나무를 심는 비용으로 쓰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792년 4월 나무 심는 일을 마치자 이 일에 참여한 8개 고을에 상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현륭원에 나무를 심는 일을 그대로 끝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1794년 1월 작헌례(酌獻禮)를 위해 현륭원을 참배한 정조가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며 “새로 심은 나무들이 거의 모두 울창하게 자랐다. 지금부터는 다시 나무를 심느라 큰 힘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현륭원에 나무 심는 일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가꾼 현륭원의 숲에 소나무의 잎을 갉아먹어 결국 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송충이가 들끓게 되었고, 이에 정조는 현륭원의 벌레를 잡는 일과 관련하여 새로운 법식(法式)을 정한 전교를 수원부에 내리게 된 것입니다. 법식의 주요 내용은 고을의 관례(官?, 관아에 소속된 낮은 신분)들을 송충이 잡는 일에 동원하지 말고 그 대신 주민들이 잡아 온 벌레를 사들이라는 것, 그리고 사들인 벌레를 현륭원 근처에 있는 구포(鷗浦) 바다에 던져 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교의 내용은 정조의 애민 정신과 미물에 대한 측은지심을 잘 보여 줍니다. 주민들이 잡아 온 벌레를 돈을 주고 사들이게 한 것은 상당히 특별한 조치였습니다. 대개 왕릉 근처 숲의 벌레를 잡는 일은 백성들이 국가에 제공해야 하는 역(役)의 하나로 관에서 부르면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해야 하는 일이었고 이에 대해 별도의 금전적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륭원의 경우 처음에는 근처 고을의 수령들을 시켜 관아에 소속된 신분 낮은 자들을 거느리고 벌레를 잡도록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된다며 잡은 벌레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바꾸도록 한 것입니다. 이 현판에 새겨진 전교 중에 있는 “관례(官?)들도 또한 백성이니, 그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일할 것을 생각하면 거의 침식(寢食)을 잊을 지경이다”라는 말이나 “각 고을 수령들이 숲 속을 왕래하느라 부딪치고 더위를 먹으며 벌레에 물리고 발에 물집이 잡힐 걸 생각하면 그 모습이 늘 눈에 보이는 듯하고 그 형세는 마치 내가 겪는 듯 완연하다(1898년 4월 28일 수원부 유수 서유린에게 내린 전교)”라는 말에는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아끼는 휴머니스트 정조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벌레를 구포 바다에 던지라는 것은 정조의 측은지심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것은 비록 죽을 운명이지만 생명체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 우러난 지시였기 때문입니다. 현판에 새겨진 전교의 내용 중 이와 관련된 부분을 아래에 옮겨 보겠습니다.
내 마음에 여전히 스스로 편치 않은 점이 있으니, 이 벌레들이 비록 벌이나 누에 같은 공(功)도 없고 모기나 등에보다 해독이 더 심하기는 해도 또한 꿈틀거리는 생물(生物)이다. ··· 의당 살리려는 덕(德)이 그 사이에 병행되도록 해야 하니 ··· 내몰아 늪으로 내치는 것이 불태워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일찍이 듣건대,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 물고기와 새우로 변한다고 하였으니 ··· 이에 여러 날 동안 깊이 궁리한 끝에 결단을 내려 법령을 만들었으니, 이후로는 잡아서 구포(鷗浦) 해구(海口)에 던지도록 하여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도성이나 왕릉의 숲에 충해가 심할 때 백성들을 동원하여 잡은 벌레들을 불에 태워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도 이와 같이 벌레를 처리하는 방법을 고려했지만 불태워 죽이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하여 중국 후한(後漢) 시대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 마원(馬援)이 무릉(武陵) 태수(太守)가 되어 빈민을 진휼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자 황충(蝗蟲: 메뚜기)이 바다로 날아 들어가 물고기와 새우로 변했다는 고사(故事)를 떠올리며 현륭원 숲에서 잡은 벌레들을 바다에 던지도록 한 것입니다.
『정조실록부록』 속편에 실려 있는 ‘정조대왕 천릉(遷陵) 지문(誌文)’에는 위와 같은 정조의 덕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원(寢園) 나무에 벌레가 생겨 잡으려고 할 때 그전에는 벌레를 모두 구덩이를 파고 불에 태워 묻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벌레도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물건이니, 몰아 쫓아버리는 것이 불에 태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듣기로는 벌레가 바다로 날아 들어가 어하(魚鰕)가 됐다고 하는데 그를 잡아 바다에다 던져버리라."
했고, 또 언젠가는 부용정(芙蓉亭)에서 연회를 하는데 들보 위에 둥우리를 튼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기 위해 날아 들어오려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돌고만 있는 것을 보고 왕이 그를 가엾게 여겨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난 일도 있었는데 이는 또 새나 벌레 같은 미물들까지도 다 왕의 지극한 은택 속에서 살고 있었던 한 단면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모든 물건까지 사랑한다."
했는데, 그것이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이종숙(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