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능자리를 살피러 가는 길: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왕릉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합니다. 국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국상을 맡아 치룰 임시 관청인 도감이 설치되는데,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왕릉을 조성하여 시신이 담긴 관인 재궁을 왕릉에 모십니다. 긴 시간에 걸쳐 복잡하게 이루어진 국상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는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왕릉 조성은 우선, 그 자리를 잡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능자리는 예조 당상관과 풍수학의 제조가 관상감의 지관과 최고의 풍수가들을 동원해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할 수 있는 명당으로 정하였는데 보통 승하 후 정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 미리 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정해진 곳을 수릉지(壽陵地)라고 부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러한 수릉지와 관련된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관된 《경이물훼》 화첩에 실린 〈태조망우령가행도〉가 그것입니다. 《경이물훼》는 의령남씨 집안에 전래된 왕실 행사도를 모사하여 궁중에 들인 내입본(內入本)으로 일제강점기까지 창덕궁 봉모당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경이물훼》에는 〈태조망우령가행도〉를 비롯하여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중종이 세자의 서연관을 위해 베푼 연회 그림〉,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명종 때 서총대에서 행해진 문무시예 행사 그림〉,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선조 때 재상 노모들의 경수연 그림〉,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영조 때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베푼 연회 그림〉 등의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 〈태조망우령가행도〉는 태조의 망우령 행차를 표현한 그림으로 바로 뒷장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연에서 남재(南在, 1351~1419)에게 동쪽 성 밖 30리에 점찍어 둔 자신의 묏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조는 그 자리 맞은 편 먼 산에 가마를 멈추고 살펴본 뒤 수릉자리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무학대사에게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무학대사 역시 보고 돌아와 국가와 더불어 종신토록 복을 누릴 자리라고 보고하자, 태조는 그 자리를 수릉자리로 삼고 남재를 위해서는 다른 묏자리를 마련해주라고 하였습니다. 태조는 평소 능자리를 정하지 못한 근심을 이제 잊을 만 하다고 하였고 그리하여 가마가 머문 지역을 이름 짓기를 ‘망우령’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그림과 내용으로 보면 태조가 살아 있을 때 망우령에 행차하였고, 지금의 태조의 왕릉인 건원릉이 그 근처인 점과 연결되어 마치 건원릉 자리를 살아 있을 때 직접 정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태조의 왕릉인 건원릉이 지금의 자리(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소재)로 결정된 것은 태조가 승하한 1408년(태종 8)이었습니다. 태조에 앞서 계비인 신덕왕후가 1396년(태조 5)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태조는 직접 행주, 안암 등에 거둥하여 능자리를 살펴 마침내 취현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일대)으로 자리를 결정하였고,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본떠 쌍릉 형태로 조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태조가 자신의 사후 자리를 미리 정한 것은 기록과 일치하지만 그 자리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일대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 옆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태조 승하 후 아들인 태종은 그러나 그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모인 신의왕후를 모신 곳은 전 왕조의 수도인 개성이었기 때문에 새 왕조의 창업주를 그 곁에 모시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자신과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였던 신덕왕후 곁에 모시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수릉자리는 도성 내에 있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아예 새로운 곳에 태조를 모시고자 하륜(河崙)으로 하여금 유한우(劉旱雨), 이양달(李陽達), 이양(李良) 등을 데리고 양주에 가 능자리를 살피도록 했습니다. 이 때 마침 김인귀가 자신이 사는 검암(儉巖)에 길지가 있다고 추천하여 하륜 등이 직접 가서 살피니 좋아 이곳으로 태조의 능자리를 정하고 태종이 직접 영구(靈柩)를 받들고 가서 모셨습니다. 이곳이 지금의 건원릉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간이 지나며 잘못 알려지게 되면서, 조선 후기에 다시 꾸며진 《경이물훼》에 지금의 내용으로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600년(선조 33) 선조 비 의인왕후가 승하하여 능자리를 정할 때 당시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시속(時俗)에 전하는 말로는 태조가 신승(神僧) 무학(無學)을 데리고 몸소 능침(陵寢)을 구하러 다니다가 산 하나를 얻고서 대대로 쓸 수 있다고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낭설이 민간에 많이 퍼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많은 국왕이 수릉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태종이나 세조처럼 미리 직접 정한 수릉에 모셔지는 경우도 있고, 태조나 영조처럼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태조와 영조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며 능자리를 마련하면서 본인도 그 곁에 함께 묻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릉지를 미리 정하였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그 일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수릉은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2011년
최나래(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