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계유증광사마방목
癸酉增司馬榜
숭정기원후186년계유왕대비전보령육순상후평복왕세자책례왕대비전보령주갑합4경경과증광사마방목(崇禎紀元後百八十六年癸酉王大妃殿寶齡六旬上候平復王世子冊禮王大妃殿寶齡周甲合四慶慶科增廣司馬榜目)은 명나라 숭정제 기원(紀元) 후 186년인 계유년 1813년(순조 13)에 설행된 증광시의 사마방목이다. 권수제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왕대비전의 보령이 육순을 맞이하였으며, 상께서 체후를 회복하였으며, 왕세자의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왕대비전의 보령이 회갑을 맞이한 네 가지의 경사를 합하여 축하하기 위해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회갑을 맞이한 왕대비는 정조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이며, 왕세자는 효명세자이다.
본 책은 시관의 명단, 생원시와 진사시의 입격자 명단, 양시(兩試), 연벽(聯璧), 초시 및 복시의 시행 날짜와 시제, 경외입격수(京外入格數), 간행기 순으로 시험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방중색장(榜中色掌), 은문색장(恩門色掌), 수권색장(收券色掌), 공포색장(貢布色掌), 제마수(齊馬首) 등은방회가 결성되지 않아 명단이 빠져 있다.[以上因榜會不成並闕焉] 양시와 연벽의 경우는 부록에도 별도로 기록하였으며, 해당 응시자의 명단 위에도 세주로 기록해 주었다.
시험의 초시는 8월 27일, 복시는 9월 28일부터 시작되어 10월 초2일에 합격자를 발표[出榜]하고 최종 합격 증서를 주는 의식인 방방의(放榜儀)는 10월 초10일 묘시(卯時)에 인정전(仁政殿)에서 행해졌다. 시관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조만원(趙萬元) 등 1소와 2소에 총 12명이 동원되었으며, 생원시에는 장원 김영민(金永敏) 등 100명이, 진사시에는 장원 황철(黃焴+攵) 등 100명이 합격하였다. 명단에는 자신의 이름 밑에 생년과 자(字)를 세주로 기록하였으며, 시험 장소와 응시 과목, 본관과 거주지,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 부모의 구존(俱存) 여부, 형제 사항 등이 적혀 있다.
시험은 생원시와 진사시가 이틀의 간격을 두고 각 1,2소에서 설행되었다. 진사시의 복시 일소에서는 부(賦) ‘其功倍於小學而無用’, 시(詩) ‘聞一善言見一善行, 若決江河沛然莫之能禦 (압운 善)’가 출제되었다. 생원시의 복시 일소에서는 사서의(四書疑)에서 ‘問: 大學曰“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云云 ~ 有心無心之間, 其所察之之道, 同歟, 異歟?’, 오경의(五經義)에서는 서의(書義)에서 ‘咨汝二十有二人, 欽哉惟時亮天功’가 시제로 출제되었다.
경외입격수에서는 서울 96인을 비롯하여, 경기 11인, 충청도 20인, 전라도 11인, 경상도 27인, 강원도 10인, 황해도 6인, 평안도 8인, 함경도 4인, 개성부 3인, 황주부 2인, 화성부 2인등 각 도의 합격자수를 기록해 주었다. 하단에는 세주로 각 도마다 생원·진사, 연벽·양시의 수까지 기록해 주었다.
권말에는 ‘乙亥季春芸閣活印 恩門’이라는 간기가 있어, 본 방목이 시험 설행 1년 뒤인 1815년(순조 15) 3월에 교서관에서 은문고직(恩門庫直)이 담당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담당자의 이름까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본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소장기호 : 古朝26-29-81), 하버드 옌칭도서관(소장기호 : TK 2291.7/1746(1813))를 비롯하여, 본관에도 동일한 방목(소장기호 : 고궁 1940)이 소장되어 있다. 다소 긴 방목명을 축약한 표제어에서 차이를 보일 뿐, 형태와 내용은 모두 동일한 판본이다.
※목차
- 恩門
- 生員試
- 進士試
- 附錄(兩試, 聯璧, 初試, 會試, 生進京外入格數, 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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